시와글(1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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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정호승
내 목숨을 버리지 않아도 천지에 냉이꽃은 하얗게 피었습니다 그 아무도 자기의 목숨을 버리지 않아도 천지는 개동백꽃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무심코 새 한 마리가 자리를 옮겨가는 동안 우리들 인생도 어느새 날이 저물고 까치집도 비에 젖는 밤이 계속되었습니다 내 무덤가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들의 새똥이 아름다운 봄날이 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보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이 더 아름다웠습니다
2022.06.23 -
시월. 황동규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목금(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3 며칠 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 다한 탓이리. 4 아늬, 석등(石燈)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 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5 낡은 단청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내 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
2022.06.23 -
그 고독을 아는 사람은 안다. 공석진
죽도록 아파 본 사람은 안다 늘상 상처를 받아 왔음으로 힘들 때마다 꾹꾹 묻어 두어 깊은 곳에서 끄집어내기까지 관성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음을 끝까지 참아 본 사람은 안다 절대로 상념에 잠기지 않고 간단히 말문을 닫아 버리고 보지 않을 것으로 체념할 때 제아무리 사무치는 고통도 가장 편안하게 되는 것임을 처절하게 외로운 사람은 안다 지구상에서 나 혼자 뿐이라는 절대 고독을 극복한다는 것 어차피 완전하지 못한 존재 무기력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순간부터인 것임을 고통만큼 분명한 고독은 없다 굴레를 벗으려 애쓰는 것보다 평생 담아 둔 아픔을 과감히 남김없이 비워내 단념하는 것 결국 그것이 인연의 끈을 놓는 우리의 최후의 모습인 것임을 그 고독을 아는 사람은 안다
2022.06.22 -
순간의 꽃. 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2022.06.22 -
순간의 꽃. 고은
바람에 날려가는 민들레씨만 하거라 늦가을 억새씨만 하거라 혼자 가서 한세상 차려보아라
2022.06.22 -
순간의 꽃. 고은
죽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천 개의 물방울 비가 괜히 온 게 아니었다
2022.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