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글(1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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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길을 걸으며. 정호승
겨울 산길 어린 상수리나무 밑에 누가 급히 똥을 누고 밑씻개로 사용한 종이 한장이 버려져 있었다 나는 나를 앞질러 가는 사람들을 급히 따라가다가 무심코 발을 멈추고 그 낡은 종이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누구나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성경 말씀이 깨알같이 인쇄된 부분에 빛바랜 똥이 묻어 있었다 누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똥을 닦을 자격이 있었던 것일까 혹시 어린 아들과 추운 산길을 가던 젊은 엄마가 급히 성경책을 찢어 아들의 똥을 닦아준 것이 아니었을까 겨울 산길을 천천히 홀로 걸으며 나를 앞질러 가는 사람들을 모두 먼저 보내고 나는 지금부터라도 어린아이의 마음이 사는 마을로 가서 봄을 맞이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 정호승 시집
2022.06.24 -
불면.벽. 정호승
이 세상에 꽃이 피는 건 죽어서 꽃으로 피어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까닭이다 그래도 이 세상에 사람이 태어나는 건 죽어서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은 꽃이 있는 까닭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녕 그렇지 않다면 왜 꽃이 사람들을 아름답게 하고 왜 사람들이 가끔 꽃에 물을 주는가 그러나 나는 평생 잠을 이루지 못한다 왜 꽃처럼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마다 짐승이 한마리씩 들어앉아 있는지 왜 개 같은 짐승의 마음 속에도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이 들어앉아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나는 평생 불면의 밤을 보내는 한마리 짐승이다 - 정호승 시집 2004 벽 / 정호승 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따스하게 어루만질 뿐이다 벽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다가 마냥 조용히 웃을 뿐이다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갈 ..
2022.06.24 -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정호승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구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
2022.06.24 -
시계의 잠. 정호승
누구나 잃어버린 시계 하나쯤 지니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 잃어버린 시계를 우연히 다시 찾아 잠든 시계의 잠을 깨울까봐 조용히 밤의 TV를 끈 적이 있을 것이다 시계의 잠속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보고 그 눈물 속에 당신의 고단한 잠을 적셔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동안 나의 시계는 눈 덮인 지구 끝 먼 산맥에서부터 걸어왔다 폭설이 내린 보리밭 길과 외등이 깨어진 어두운 골목을 끝없이 지나 술 취한 시인이 방뇨를 하던 인사동 골목길을 사랑하고 돌아왔다 오늘 내 시계의 잠 속에는 아파트 현관 복도에 툭 떨어지는 조간신문 소리가 침묵처럼 들린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너의 폭탄테러에 죽었다가 살아났다 서울역 지하도에서 플라스틱 물병을 베고 잠든 노숙자의 잠도 다시 죽었다가 살아나고 내 시계의 잠 속에는 오늘..
2022.06.24 -
폐계. 정호승
양계장에 갇혀 형광등 하얀 불빛 아래 알만 낳고 살던 정해진 시간에 자동으로 나오는 물과 사료만 먹고 살던 이제는 깃털마저 다 빠져버린 통닭이 되는 일 외엔 아무 일도 남아 있지 않는 허연 폐지뭉치 같은 닭 몇마리 어머니가 고향집 뒤뜰에 살며시 풀어놓자 봄비가 내렸다 감나무에 새잎이 돋고 거죽만 남은 폐계(廢鷄)의 날개에도 새 깃이 돋았다 감꽃이 피고 감들이 밤마다 발갛게 백촉 전깃불을 밝히는 동안 어느새 힘 잃은 날갯죽지에도 다시 힘이 솟아 처음에는 폐계들이 장독대에 푸드덕 올라가더니 오늘은 감나무에도 훌쩍 날아올라가 홍시처럼 붉은 한가위 달을 보고 호호 웃는다 - 정호승 시집 2007
2022.06.24 -
서울의 예수. 정호승
1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는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은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는 절..
2022.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