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글(1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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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느별에서. 정호승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새벽을 흔들어 깨우느냐. 해 뜨기 전에 가장 추워하는 그대를 위하여 저문 바닷가에 홀로 사람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 어느 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2022.06.24 -
포옹. 정호승
뼈로 만든 낚시 바늘로 고기잡이하며 평화롭게 살았던 신석기 시대의 한 부부가 여수항에서 뱃길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한 섬에서 서로 꼭 껴안은 채 뼈만 남은 몸으로 발굴되었다 그들 부부는 사람들이 자꾸 찾아와 사진을 찍자 푸른 하늘 아래 뼈만 남은 알몸을 드러내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수평선 쪽으로 슬며시 모로 돌아눕기도 하고 서로 꼭 껴안은 팔에 더욱더 힘을 주곤 하였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지 못하고 자꾸 사진만 찍고 돌아가고 부부가 손목에 차고 있던 조가비 장신구만 안타까워 바닷가로 달려가 파도에 몸을 적시고 돌아오곤 하였다
2022.06.24 -
가시. 정호승
지은 죄가 많아 흠뻑 비를 맞고 봉은사에 갔더니 내 몸에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손등에는 채송화가 무릎에는 제비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야윈 내 젖가슴에는 장미가 피어나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토록 가시 많은 나무에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생각하라고 장미는 꽃에서 향기가 나는 게 아니라 가시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라고 가장 날카로운 가시에서 가장 멀리 가는 향기가 난다고 장미는 시들지 않고 자꾸자꾸 피어나 나는 봉은사 대웅전 처마 밑에 앉아 평생토록 내 가슴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가시를 힘껏 뽑아내려고 하다가 슬며시 그만두었다 - 정호승 시집
2022.06.24 -
나비. 정호승
어느 봄날 셔터가 내려진 청계천 평화시장 쓰레기도 깊이 잠든 골목 끝 빈 지게를 내려놓고 늙은 지게꾼 한분 차가운 셔터문에 기대 잠들어 있고 어디서 날아왔을까 그분의 지겟가지 끝에 노랑나비 한마리 앉아 고요하다 거름지게를 지고 이슬에 바짓가랑이를 흠뻑 적시며 평생 새벽길을 걸어가셨던 아버지를 꿈꾸는 것일까 나비는 좀처럼 날아가지 않는다 그분이 깨어나면 함께 짐을 지고 가려고 그분이 일어나 동대문 쪽으로 걸어가면 그대로 지게 끝에 앉아 길을 건너려고 - 정호승 시집 2004
2022.06.24 -
기차. 정호승
역마다 불이 꺼졌다 떠나간 기차를 용서하라 기차도 때로는 침묵이 필요하다 굳이 수색쯤 어디 아니더라도 그 어느 영원한 선로 밖에서 서로 포기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
2022.06.24 -
루즈가 묻은 담배꽁초는 섹시하다. 정호승
새벽 미사가 끝나자 눈이 내린다 어깨를 구부리고 눈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롱부츠를 신은 여자가 가로등 불빛 아래 담배를 피우며 서 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이라도 한번 더 보기 위하여 찾아온 것일까 큰수녀님은 싸리 빗자루로 성당 앞에 내리는 눈을 쓸고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가 기어내려온 사내처럼 알몸의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여자 앞을 지나간다 여자는 눈송이 사이로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입술을 내던지듯 담배꽁초를 휙 내던진다 눈길에 떨어진 붉은 루즈가 묻은 담배꽁초는 섹시하다 만나기 전에 이미 헤어지고 헤어지기 전에 이미 만난 적이 있었던가 눈은 내리는데 가로등 불빛 아래 하루살이떼처럼 눈송이는 날리는데 여자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인다
2022.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