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산길을 걸으며. 정호승

2022. 6. 24. 09:04시와글

겨울 산길 어린 상수리나무 밑에
누가 급히 똥을 누고 밑씻개로 사용한
종이 한장이 버려져 있었다
나는 나를 앞질러 가는 사람들을 급히 따라가다가
무심코 발을 멈추고
그 낡은 종이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누구나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성경 말씀이 깨알같이 인쇄된 부분에
빛바랜 똥이 묻어 있었다
누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똥을 닦을 자격이 있었던 것일까
혹시 어린 아들과 추운 산길을 가던 젊은 엄마가
급히 성경책을 찢어
아들의 똥을 닦아준 것이 아니었을까
겨울 산길을 천천히 홀로 걸으며
나를 앞질러 가는 사람들을 모두 먼저 보내고
나는 지금부터라도
어린아이의 마음이 사는 마을로 가서
봄을 맞이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 정호승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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