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글(1562)
-
친구에게. 박두순
친구야 너는 나에게 별이다. 하늘 마을 산자락에 망초꽃처럼 흐드러지게 핀 별들 그사이의 한 송이 별이다. 눈을 감으면 어둠의 둘레에서 돋아나는 별자리 되어 내 마음 하늘 환히 밝히는 넌 기쁠 때도 별이다. 슬플 때도 별이다. 친구야 네가 사랑스러울 땐 사랑스런 만큼 별이 돋고 네가 미울 땐 미운 만큼 별이 돋았다. 친구야 숨길수록 빛을 내는 너는 어둔 밤에 별로 떠 내가 밝아진다.
2022.08.14 -
김장배추. 김은순
내찬 된서리 심술 안간힘 쓰다 끝내, 누우렇게 시커멓게 나가떨어지는 퍼런 이파리들 아랑곳없이 그루터기만 남은 휘휘한 논배미 옆 겨우내 밥상 감초 될 푸릇, 혈기왕성한 김장배추 허리 바짝 동여매고 임자 만나 이 허리끈 풀 때까지는 누구도 내 속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두 눈 시퍼렇게 부릅뜨고 발갛게 꽃단장 할 때까지 죽어라 허리 꽈악 붙들어 매고 옹골차게 속 채워가며 아금박지게 자리 지키고 있다 세상사 그렇고 그런 거다 무시로 쉬이 헐거워지는 사람들 허리끈 배추, 그 옆 지나는 뒤통수 찬바람에도 뜨끈하다
2022.08.13 -
언땅이 풀릴때. 차창호
조카가 팽이 줄을 감는다 금 간 벽에 기대선 내 이마의 주름을 잡아 감는다 마을을 가로질러 달리는 꽃샘바람 둘둘 묶어 감는다 바람에 불려오는 소똥냄새 그 냄새 잡고 따라 나온 개나리꽃 노란 빛 당겨 감는다 아버지 논 갈아엎는 소리 개울가 저만치 떨어진 개구리 울음 조그만 두 손으로 꼭꼭 감는다 푸른 하늘과 구름 그림자 도도한 강물의 흐름 모두 감았다 팽이를 돌린다 산그늘 아래 언 땅 녹듯 눈물 비친 사랑과 그리움 세월의 무늬가 단숨에 풀어진다 1973년 강원 춘천 출생 200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아동문학 당선
2022.08.13 -
나의 살던 고향. 차창호
가을 무구덩이를 판다 반 평짜리 내 몸 뉠 자리 그만큼 삽으로 흙을 파내고 큰 무 작은 무 함빡 재어 놓아 왕겨 한 가마 흩뿌리고 나면 노랑노랑 놀 번지던 그날 저녁 하늘이 생각난다 어머니는 소슬바람 한 자락에도 슬관절을 다쳐 물이 차올랐다 적은 물소리에도 마당의 평상이나 댓돌에 눌러앉아 멀리 물 흘러 사리질 때 까지 기다리곤 했는데 목장 안에 아버지는 소가 아프다고 볏짚을 한 수레 썰어 펴놓고는 밤새 무심한 달빛 아래 서 있었다 입동 지나 뒤꼍 응달 아래 통무에 쪽배추 몇 폭 널어 담근 동치미 한다기 꺼내 먹는 날은 고목나무에 꽃 피는 마음을 숨기려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호랑지빠귀 새가 되어 양지바른 나뭇가지에 날아와 앉아 울었다 입춘 지나 뒷산 풀섶에서 다른 새들이 봄씨를 주워 입에 ..
2022.08.13 -
차창호 시인 시 두편
1.된장이야기 보름달, 빛으로 익힌 된장 한 숟갈 떠서 담는다 거기서 무슨 우스운 얘기를 들어서였을까 히히히 뜻 없이 웃음 한 입 꿀꺽 삼킨다 겨우내 코를 막고 씩씩거리던 아이도 토장국 한 그릇 더 주세요 하고 옷마다 메주 냄새 다 밴다고 신경질 부리던 누이동생도 언제 그랬냐는 듯 밥 말아먹는다 히히히 자다가도 웃음을 흘린다 거기서도 무슨 재미난 얘기들 꽃피우는지 보름달, 빛으로 빚은 된장 한 그릇 퍼 담으면 자갈돌을 물길을 만들고 그리운 것들은 다리를 만든다. (02강원 신춘) 2. 아름다움 하나를 위하여-메주 함박눈 펑펑펑 내리는 저녁, 난 눈 코 입 문드러진 문둥이가 되는 거야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그랬듯이 몸에 스스로 큰 상처를 내 욕망의 결절을 다 뱉어내고 누룩빛으로 마음껏 배불리는 ..
2022.08.13 -
휴대폰. 정군수
허공을 떠돌다가 나의 귀에 닿지 못하는 너의 소리는 푸석푸석한 낙엽이다 말라버린 억새꽃이다 회오리바람에 치솟았다가 불려가는 주인 없는 비닐봉지이다 허공을 가로질러 나에게 닿는 너의 소리는 은결 돋우는 나비의 날개이다 별을 채가는 독수리의 발톱이다 어두운 밤을 뚫고 짝을 찾아가는 짐승의 숨소리이다 너의 소리는 무지개다리를 건너오기도 하지만 펄펄 끓는 유황의 강을 건너 독 묻은 발로 찾아오기도 한다
2022.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