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글(1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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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나절이다. 박종국
스멀스멀 기어오른 벌레 같은 어둠이 능선을 갉아먹는 소리, 놀라 뛰는 노루 뒷발에 채인 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 암노루 궁뎅이가 희끗희끗 산기슭을 적시는 저녁나절이다 그런 틈새에 살아가는 것들, 어슴푸레한 빛 속 어둠이 몰고 오는, 견디기 어려운 푸석거림, 가엾은 마음을 사르는 능선이 붉은 저녁나절이다 어둠이 빛을 지우는 부적 같은 한 장의 그림이 드러내 보이는 숲 속에는 꽃과 잎들이 떨며 진주 같은 이슬방울 떨어뜨리고, 껍질을 하나하나 벗는 산봉우리, 장엄한 시간을 알려주는 저녁나절이다 잃을 것도 없는 것을 잃을까 바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저녁나절 어둠이 능선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어둠에 익숙한 하늘은 밥풀 같은 별 몇 알 오물거리고 있다.
2022.10.31 -
내일은 영원. 이기철
나에게 따뜻함을 준 옷에게 나에게 편안함을 준 방에게 배고픔을 이기게 한 식탁에게 고백을 들어줄 수 있는 귀를 가진 침묵에게 나는 고마움을 전해야 한다 바느질 자국이 많은 바지에게 백 리를 데려다준 발에게 늘 분홍을 지닌 마음에게 고단한 꿈을 누인 집에게 유언을 써본 일 없는 나무에게 늘 내부를 보여주는 꽃에게 부리로 노래를 옮겨 주는 새에게 분홍을 실어오는 물에게 나는 가난 한 벌 지어 입고 너의 이름으로 초록 위를 걸어간다 언제나 처음 오는 얼굴인 아침에게 하루치의 숨을 쉬게 하는 공기에게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주는 햇빛에게 그리고 마지막 사랑이라고 쓸 수 있는 손에게 수저를 들 때처럼 고마움 전해야 한다 손을 사용할 수 있는 힘에게 백합 한 송이를 선물하고 싶은 가슴에게 흙 위에 그의 이름을 쓸 수 ..
2022.10.31 -
그냥커피. 오탁번
옛날다방에서 그냥커피를 마시는 토요일 오후 산자락 옹긋옹긋한 무덤들이 이승보다 더 포근하다 채반에서 첫잠 든 누에가 두잠 석잠 다 자고 섶에 올라 젖빛 고치를 짓듯 옛날다방에서 그냥커피 마시며 저승의 잠이나 푹 자고 싶다
2022.10.29 -
가을 햇볕. 안도현
가을 햇볕 한마당 고추 말리는 마을 지나가면 가슴이 뛴다 아가야 저렇듯 맵게 살아야 한다 호호 눈물 빠지며 밥 비벼 먹는 고추장도 되고 그럴 때 속을 달래는 찬물의 빛나는 사랑도 되고
2022.10.27 -
두가지만 주소서. 박노해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인내를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나보다 약한 자 앞에서는 겸손할 수 있는 여유를 나보다 강한 자 앞에서는 당당할 수 있는 깊이를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가난하고 작아질수록 나눌 수 있는 능력을 성취하고 커 나갈수록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관계를 나에게 단지 한 가지만 주소서 좋을 때나 힘들 때나 삶에 뿌리 박은 깨끗한 이 마음 하나만을
2022.10.26 -
인생의 계획. 글래디 로울러
난 인생의 계획을 세웠다. 청춘의 희망으로 가득한 새벽빛 속에서 난 오직 행복한 시간들만을 꿈꾸었다. 내 계획서엔 화창한 날들만 있었다. 내가 바라보는 수평선엔 구름 한 점 없었으며 폭풍은 신께서 미리 알려 주시리라 믿었다. 슬픔을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 계획서에다 난 그런 것들을 마련해 놓지 않았다. 고통과 상실의 아픔이 길 저 아래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난 내다볼 수 없었다. 내 계획서는 오직 성공을 위한 것이었으며 어떤 수첩에도 실패를 위한 페이지는 없었다. 손실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았다. 난 오직 얻을 것만 계획했다. 비록 예기치 않은 비가 뿌릴지라도 곧 무지개가 뜰 거라고 난 믿었다. 인생이 내 계획서대로 되지 않았을 때 난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인생은..
2022.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