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글(1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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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날. 미당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2022.07.20 -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
의미심장..비온뒤 무지개. ㅎㅎ
2022.07.19 -
새. 천상병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2022.07.19 -
시집보내다. 오탁번
새 시집을 내고 나면 시집 발송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속표지에 아무개 님 청람淸覽, 혜존惠存, 소납笑納 반듯하게 쓰고 서명을 한다 주소와 우편번호 일일이 찾아 쓰고 튼튼하게 테이프로 봉해서 길 건너 우체국까지 내 영혼을 안고 간다 시집 한 권 정가 8000원 우표값 840원, x200권, 300권..... 외로운 내 영혼을 떠나보낸다 십 몇 년 전 을 냈을 때 - 벙어리장갑 받았어요 시집 잘 받았다는 메시지가 꽤 왔다 어? 내가 언제 벙어리장갑도 사줬나?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 끼고 옥수수수염빛 입김 호호 불면서 내게로 막 뛰어오는 아가씨와 첫사랑에 빠진 듯 환하게 웃었다 몇 년 전 을 냈을 때 - 손님 받았어요 시집 받은 이들이 더러더러 메시지를 보냈다 그럴 때면 내 머릿속에 야릇한 서사적 무대가 ..
2022.07.19 -
마늘밭. 오탁번
텃밭에 마늘 두 접을 심었다 친환경 유기농 퇴비와 복합비료를 잘 뿌려주고 육쪽 마늘을 정성껏 심었다 마늘밭 이랑에 비닐을 씌우지 않고 솔잎을 긁어다가 덮었다 겨우내 눈 쌓인 마늘밭을 보면서 비닐 대신 괜히 솔잎을 덮어 마늘이 얼어 죽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솔잎을 헤치며 강보에 싸인 아기 손가락 같은 여린 마늘싹이 하나도 죽지 않고 쏙쏙 돋아났다 금빛으로 빛나는 마늘밭을 아침마다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꽃샘추위 매서운 날 농사짓는 초등학교 동창이 왔길래 마늘밭 자랑을 한참 했다 - 야, 마늘밭 좀 봐! 너무 멋지지? 허지만 녀석은 싱겁기만 하다 - 마늘밭이 다 그렇지 뭐! 우리가 주고받는 엉뚱한 말에 앞산 진달래가 꽃봉오리 터뜨린다
2022.07.19 -
버스승강장. 오탁번
태백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자작나무 숲이 손 흔드는 삼수령을 지나면 고랭지배추밭이 하늘보다 푸른 태백시 삼수동 상사미 마을에 야릇한 버스승강장이 하나 있었다 '버스승강장 권상철집앞'! 근처에 딱히 표시할 만한 것이 없어 개울 건너 토박이 농부의 이름을 딴 버스승강장 팻말이 길가에 앙바틈히 서 있었다 몇 년 후 다시 찾아간 상사미 마을 권노인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이름으로 바뀐 버스승강장을 보자 가슴이 찡해졌다 '버스승강장 권춘섭집앞'!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유산인 듯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물림한 버스승강장 팻말이 검룡소 물 흐르는 개울가에 허아비처럼 서 있었다
2022.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