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글(1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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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길.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2022.06.10 -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정호승
나는 왜 아침 출근길에 구두에 질펀하게 오줌을 싸놓은 강아지도 한마리 용서하지 못하는가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는 순간 새로 갈아 신은 양말에 축축하게 강아지의 오줌이 스며들 때 나는 왜 강아지를 향해 이 개새끼라고 소리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개나 사람이나 풀잎이나 생명의 무게는 다 똑같은 것이라고 산에 개를 데려왔다고 시비를 거는 사내와 멱살잡이까지 했던 내가 왜 강아지를 향해 구두를 내던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데 나는 한마리 강아지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진실로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윤동주 시인은 늘 내게 말씀하시는데 나는 밥만 많이 먹고 강아지도 용서하지 못..
2022.06.10 -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과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2022.06.10 -
새로운 길. 윤동주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 내일도 ···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2022.06.10 -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2022.06.10 -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2022.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