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 증후군. 도종환
2024. 12. 23. 00:00ㆍ시와글
도심에 들어서면 나는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미끄러진다
신호등 앞에 멈추어 서서 기다리는 짧은 동안
내 몸은 어색하고 낯설고 불편하다
지하철에서는 어떻게든 몸을 부딪치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퇴근길에 화물이 된 몸들 사이에 빼곡히 끼어 있으면서도
나는 연신 주문을 외운다
닿지 않았다고 닿은 게 아니라고
타자와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그러면서 서서히 경직된다 겉돈다
웃어도 안 되고 긴장을 풀어도 안 되는 내 얼굴
내 피톨들은 딱딱하게 굳어진 채로
토사물처럼 문 밖으로 토해지곤 한다
나는 기도로 잘못 들어간 음식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라인으로 밀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나를 부르면
나는 다시 활기를 찾고 치아는 생기에 넘친다
근육은 명랑해지며 여유는 제 얼굴을 되찾는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만 편안해지는 목소리
무선으로만 소통이 가능해지는 짧은 시간이 끝나면
나는 다시 경계하며 거리를 걷는다
내 앞을 가로막는 유령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그림자를 끌고 간다 오프라인에서
어쩌면 나도 유령인지 모른다
'시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탄시 모음. 박목월 시인 작품 (0) | 2024.12.24 |
---|---|
동저고리. 강우식 (0) | 2024.12.23 |
알요강. 오탁번 (0) | 2024.12.23 |
내 시를 생각하는데 눈이 왔다. 김용택 (0) | 2024.12.22 |
동지 팥죽. 이문조 (0) | 2024.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