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 묘지1. 기형도

2022. 10. 9. 22:53시와글



주인은 떠나 없고 여름이 가기도 전에 황폐해버린 그해 가을,
포도밭 등성이로 저녁마다 한 사내의 그림자가 거대한 조명 속에서
잠깐씩 떠오르다 사라지는 풍경 속에서 내 弱視의 산책은 비롯되었네.
친구여, 그해 가을 내내 나는 적막과 함께 살았다. 그때 내가 데리고 있던
헛된 믿음들과 그뒤에서 부르던 작은 충격들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네.

나는 그때 왜 그것을 몰랐을까. 희망도 아니었고 죽음도 아니었어야 할
그 어둡고 가벼웠던 종교들을 나는 왜 그토록 무서워했을까.
목마른 내 발자국마다 검은 포도알들은 목적도 없이 떨어지고 그때마다
고개를 들면 어느 틈엔가 낯선 풀잎의 자손들이 날아와 벌판 가득 흰
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네.

어둠은 언제든지 살아 있는 것들의 그림자만 골라 디디며
포도밭 목책으로 걸어왔고 나는 내 정신의 모두를 폐허로 만들면서
주인을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림이란 마치 용서와도 같아 언제나
육체를 지치게 하는 법. 하는 수 없이 내 지친 발을 타일러 몇 개의
움직임을 만들다보면 버릇처럼 이상한 무질서도 만나곤 했지만 친구여,
그때 이미 나에게는 흘릴 눈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 정든 포도밭에서 어느 하루 한 알 새파란 소스라침으로 떨어져
촛농처럼 누운 밤이면 어둠도, 숨죽인 희망도 내게는 너무나 거추장스러웠네.
기억한다. 그 해 가을 주인은 떠나 없고 그리움이 몇 개 그릇처럼 아무렇게나
사용될 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짧은 촛불들을 태우곤 했다.

그렇게 가을도 가고 몇잎 남은 추억들마저 천천히 힘을 잃어갈 때 친구여,
나는 그때 수천의 마른 포도 이파리가 떠내려가는 놀라운 空中을 만났다.
때가 되면 태양도 스스로의 빛을 아껴두듯이 나 또한
내 지친 정신을 가을 속에서 동그랗게 보호하기 시작했으니
나와 죽음은 서로를 지배하는 각자의 꿈이 되었네. 그러나 나는 끝끝내
포도밭을 떠나지 못했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어느날 기척 없이 새끼줄을 들치고 들어선
한 사내의 두려운 눈빛을 바라보면서 그가 나를 주인이라 부를때마다
아, 나는 황망히 고개 돌려 캄캄한 눈을 감았네. 여름이 가기도 전에 모든 이파리
땅으로 돌아간 포도밭, 참담했던 그해 가을, 그 빈 기쁨들을 지금 쓴다 친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