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 차창호

2022. 8. 13. 19:22시와글



가을 무구덩이를 판다
반 평짜리 내 몸 뉠 자리
그만큼 삽으로 흙을 파내고
큰 무 작은 무 함빡 재어 놓아
왕겨 한 가마 흩뿌리고 나면
노랑노랑 놀 번지던 그날 저녁 하늘이 생각난다

어머니는 소슬바람 한 자락에도
슬관절을 다쳐 물이 차올랐다
적은 물소리에도 마당의 평상이나
댓돌에 눌러앉아 멀리 물 흘러 사리질 때 까지 기다리곤
했는데
목장 안에 아버지는 소가 아프다고
볏짚을 한 수레 썰어 펴놓고는
밤새 무심한 달빛 아래 서 있었다

입동 지나 뒤꼍 응달 아래
통무에 쪽배추 몇 폭 널어 담근
동치미 한다기 꺼내 먹는 날은
고목나무에 꽃 피는 마음을 숨기려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호랑지빠귀 새가 되어 양지바른 나뭇가지에
날아와 앉아 울었다


입춘 지나 뒷산 풀섶에서 다른 새들이 봄씨를 주워
입에 물고가는 사이
아버지는 꽝꽝 언 밭 여기저기
몽실몽실해진 지난해 소똥을 꺼내 덮어 주고는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콧물로 풀어내 버렸다 음력 정월 벽에 붙은 볕을 만져 보고
마당에 자는 바람을 들여다보던 어머니
가마 걸고 메주를 쑤는 어느 날 아침
싸락눈이 하얗게 내렸다 -차창호 시인의 아버지의 꽃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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