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나도. 임영조

2024. 10. 30. 00:00시와글


                          


저마다의 안색이
보다 투명해진 이 가을
나도 한 알의 과일로 익고 싶다

지난 여름 뜨락에서
악몽으로 시달려온 불면과
남은 피도 다 삭여
이제는 내용이 선명한 과일
벗겨도 부끄러울 것 없는
가장 진한 언어로 익어
안식하는 지상에 내리고 싶다

수척한 햇살은 문득
땅 짚고도 쓰러지는 이 가을
누구든 만나고 싶다
아직도 내 이름을 기억하는 이
눈이 맞아 설레는 사람이라면

마지막 이승을 하직하듯
온몸을 맡기고, 남은 피도 바치고
이 가을 적시는 향기로 남고 싶다
이 고요 깨우는 소리로 남고 싶다.

'시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없다. 오탁번  (0) 2024.10.31
시래기. 도종환  (0) 2024.10.31
빨간 머리앤 6권  (0) 2024.10.29
사흘 뒤. 도종환  (0) 2024.10.29
가을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0) 2024.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