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1. 00:00ㆍ시와글
❄️눈꽃 / 도종환
잔가지 솜털 하나까지 파르르 떨며
눈꽃을 피워들고 서 있는 달밤의 숲은
그대로가 은빛 빛나는 암유의 궁전입니다.
보름 지나면서 달의 몸 한쪽이
녹아 없어진 이유를 알겠습니다
몸을 납처럼 녹여 이 숲에 부어버린 것입니다
달빛에 찍어낸 듯 나무들이 반짝이며 서 있습니다
나무들은 저마다 한 개씩의 공안입니다
다보여래가 증명하는 화려한 은유의 몸짓입니다
체온이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갔을 때
거기서 가장 아름다운 광채가 뿜어져나오고
깊고 외롭고 처절한 시간 속에서
고요하게 빛나는 적멸의 언어를 만나는 것입니다
생의 가장 헐벗은 시간을 견디는 자에게 내린
혹독한 시련을 찬란한 의상으로
바꾸어 입을 줄 아는 게 나무 말고 또 있으니
돌아가 찾아보라고 말합니다
돌아가는 동안 부디 침묵하고
돌아가 알게 되어도 겨울나무들의
소리 없는 배경으로 있어 달라고
❄️눈꽃 / 윤보영
화려한 눈꽃도
녹으면 그만이지만
내안에 활짝 핀 눈꽃은
녹지 않는 답니다
그대 생각하는 꽃이니까요
❄️눈꽃 노래 / 이해인
하얀 눈 내리는 날
어디선가 예쁘게
새소리 들려오고
내 마음에 흐르는
시냇물 소리
하루 종일 흘러서
나는 잠들 수도 없네
물소리 따라
맑은 세상 끝까지
가보아야지
순례자인 내가
어머니를 만나
환히 웃을 때까지
❄️눈꽃아가 1 / 이해인
차갑고도 따스하게
송이송이 시가 되어 내리는 눈
눈나라의 흰 평화는 눈이 부셔라
털어내면 그뿐
다신 달라붙지 않는
깨끗한 자유로움
가볍게 쌓여서
조용히 이루어내는
무게와 깊이
하얀 고집을 꺾고
끝내는 녹아버릴 줄도 아는
온유함이여
나도 그런 사랑을 해야겠네
그대가 하얀 눈사람으로
나를 기다리는 눈나라에서
하얗게 피어날 줄밖에 모르는
눈꽃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순결한 사랑을 해야겠네
❄️눈꽃아가 2 / 이해인
평생을 오들오들
떨기만 해서 가여웠던
해묵은 그리움도
포근히 눈밭에 눕혀놓고
하늘을 보고 싶네
어느 날 내가
지상의 모든 것과 작별하는 날도
눈이 내리면 좋으리
하얀 눈 속에 길게 누워
오래도록 사랑했던
산과 이웃을 위해
이기심의 짠맛은 다 빠진
맑고 투명한 물이 되어 흐를까
녹지 않는 꿈들일랑 얼음으로 남기고
누워서도 잠 못 드는
하얀 침묵으로 깨어 있을까
❄️눈꽃아가 3 / 이해인
첫눈 위에
첫 그리움으로
내가 써보는 내 이름
맑고 순한 눈빛의 새 한 마리
나뭇가지에서 기침하며
나를 내려다본다
자꾸 쌓이는 눈 속에
네 이름은 고이 묻히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무수히 피어나는 눈꽃 속에
나 혼자 감당 못할
사랑의 말들은
내 가슴속으로 녹아 흐르고
나는 그대로
하얀 눈물이 되려는데
누구에게도 말 못할
한 방울의 피와 같은 아픔도
눈밭에 다 쏟아놓고 가라
부리 고운 저 분홍가슴의 새는
자꾸 나를 재촉하고......
❄️눈꽃 / 박노해
봄가을에 피는 꽃도 아름답지만
겨울숲에 피는 눈꽃도 아름다워라
언바람이 살을 훑고 지나간 몸에
스스로 벌하듯 묵묵히 서서
어둠속 뿌리로 피워올리는
겨울숲에 하얀 눈꽃도 아름다워라
❄️눈꽃 / 박노해
겨울밤
빈 가지에 피어나는
흰 눈꽃
지상에서
한 번도 피지 못한 자들의
차가운 한숨과 울분과
슬픔의 비나리만 같은
눈꽃
하늘꽃
눈물꽃
언 바람 우는 빈 가지에
순백의 알몸 던져 피워 올리는
상처난 것들의 눈물꽃
뜨거운 새싹의 흰 눈꽃
❄️산속의 눈꽃 / 이재무
다 늙은 山의 살갗에 달려들어
눈꽃은 더욱 입술을 꼭꼭 문질러대고 있었다
山은 끙, 하고 돌아누웠다
그때마다 자지러지게 가지가
몸을 흔들어 소복이 쌓인 소녀들의 웃음
깔깔깔 날려대었다 그렇게
하루 한나절 천상의 소녀들의 한바탕
소란하게 소풍 마치고 가면
山의 살결은 나이도 잊은 채
떡고물처럼 찰지고 부드러워지는 거였다
우리의, 흥분한 땀방울이 두꺼운 살을
벗어나 소용돌이치며 급하게 빠져나갔다
❄️눈 꽃 / 김대식
꽃만 꽃이 아니더라
눈꽃도 꽃이더라
추운 겨울에도 앙상한 겨울나무
하얗게 눈부신 눈꽃을 피우더라
온 산이 꽃으로 물든
꽃 피는 봄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더라
온산을 붉게 물들인
단풍으로 가득한 가을 산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더라
잎 떨어져 벌거벗은 겨울 산에도
온 산이 하얗게 나무마다 눈 꽃 피어
수정처럼 반짝이며 눈부시게 빛나더라
❄️눈꽃 / 류시화
잎이 저버린 빈 가지에 생겨난
설화를 보고 있으면
텅 빈 충만감이 차오른다
아무것도 지닌 것 없는
빈 가지이기에
거기,
아름다운 눈꽃이 피어난 것이다.
잎이 달린 상록수에서
그런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어렵다.
거기에는 이미 매달려 있는 것들이 있어
더 보탤 것이 없기 때문이다.
❄️눈꽃 같은 내 사랑아 / 이채
내 꽃의 수줍은 표정은
장밋빛 붉은 가슴 보일 수 없기 때문이며
내 꽃의 차가운 두 볼은
달콤한 그대 입술 스칠 수 없기 때문이며
내 꽃의 하얀 눈물은 따뜻한 그대 품 속 안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진주보다 곱고 이슬보다 영롱합니다
꽃잎마다 맑고 고운 저 눈빛 좀 보세요
달도 없고 별도 없는 밤
행여 그대 창가에 한아름 눈꽃송이 내리거든
하얀 날개 접고
꿈결에도 잠들고 싶은 내 그리움인 줄 아세요
얼지 않으면 필 수 없는 내 꽃이 씨앗인들 있을까요
피었다 지면 그뿐
빗물처럼 흘러 어디쯤 머물러도
달래는 가슴 뒤로 슬픔을 감추어도
이미 두 눈엔 그대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어디론가 떠나야 할 시간이 오면
그대는 가장 먼 종소리로 울릴 것이며
나는 가장 깊은 눈물로 흐를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가장 고요한 밤을 맞을 것입니다
눈꽃 같은 내 사랑아!
그대를 사랑하는 자유로
나는 영혼의 자유를 잃고 고독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처음부터 나는 그대에게 완벽한 꽃은 아니지만
그대가 그리울 때면 이렇듯 간절한 꽃으로 피어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하얀 꽃으로
❄️삼월눈꽃 / 송희
삼월도 중순이 지난 한밤중에 펑펑 눈이 쏟아집니다
하늘 정원에서 터뜨리기 시작한 봄의 꽃가루인 게 틀림없습니다
선운사 동백은 면사포 쓴 봄을 마당에 세워둔 채
터지려는 제 멍울의 신음을 틀어막고 진저리칩니다
누군가 참으로 아름다운 이별을 하는 게 틀림없습니다
누군가 참으로 혹독한 사랑을 하는 게 틀림없습니다.
출처: https://todaystory-1.tistory.com/443 [오늘의 좋은글: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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