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

2022. 7. 19. 07:51시와글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눈이 밝으면 귀가 맑게 뜨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 년 동안 땅에 붙여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 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아
해 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 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 스톱도 급행 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갯짓.
지난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 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불씨,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는 눈이 내린 숲속으로 빨려가고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불씨, 불씨를 분다.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 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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