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노래. 김대규

2024. 11. 4. 00:00시와글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떠나지 않아도
황혼마다 돌아오면 가을이다

사람이 보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편지를 부치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주머니에 그대로 있으면 가을이다

가을에는
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지고
그 맑은 마음결에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떠보낸다

주여!라고 하지 않아도
가을엔 생각이 깊어진다
한마리의 벌레 울음소리에
세상의 모든 귀가 열리고
잊혀진 일들은
한잎 낙엽에 더 깊이 잊혀진다

누구나 지혜의 걸인이 되어
경험의 문을 두드리면
외로움이 얼굴을 내밀고
삶은 그렇게 아픈거라 말한다
그래서 가을이다

산자의 눈에
이윽고 들어서는 죽음
사자(死者)들의 말은 모두 시가 되고
멀리 있는 것들도
시간 속에 다시 제자리를
잡는다

가을이다
가을은
가을이란 말 속에 있다

(김대규 (1942-2018) 1960년 시집 '영의 유형'으로 데뷔)

'시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월. 최정례  (0) 2024.11.05
11월의 시. 이재곤  (0) 2024.11.04
가을의 기도. 김남조  (0) 2024.11.04
사과나무. 류시화  (0) 2024.11.03
11월. 박영근  (0) 2024.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