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희생 기억합니다,가슴 깊이 감사합니다

2022. 7. 30. 15:42시와글

이우근 학도병님의 피맺힌 일기

보병 제 3사단 학도병 중대(3)  
포항 여중앞 전투에서 전사한 이우근이 피와 눈물로 아로 새겨놓은한 장의 기록이 있다.
이는 이우근의 피묻은 일기 수첩이었다.
당시 이우근은 서울 동성 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천주교 신자로 알려지고 있다.
집에 있으라는 어머니의 권유를 무릅쓰고 펜대신 총을 들기 위해 혜화동에서 두 형제를 데리고 온 덕만이와 함께 한강을 건너 안성에 도착, 평택에서 덕만 일행과 헤어지고 대구에 내려와 학도병에 지원했다. 1950년 8월 11일 하오 3시, 폭양이 내리 쪼이는 산하에서 죽어간 이우근 학도병 교복 상의에서 낡은 수첩이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었다. 그는 6,25(일) 6,26(월) 6,27(화) 6,28(수) 7,2(일) 7.3(월) 7,20(목) 7.25(화)
7,26(수) 7,27(목)요일의 일기가 수첩에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7월 27일 이후부터 일기는 멈췄다.
7월 27일 안동에 도착해서 전선의 분위기에 마음이 착잡해진 것 같다
또한 부모형제가 뿔뿔이 헤어지고 생사 여부를 몰라 답답하고 무거운심정을 토로했는데 아마도 괴로운 기록을 중단한 것 같다.
이우근학생은 지금의 학생들 보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지적인 수준이높고 국가관이 뚜렷한 것 같았다.

8월 10일 목요일 일기는 포항 여중앞 전투가 있기 하루 전에 기록되어있었다. 그리고 격전 당일에 쓰인 8월 11일의 일기는 글씨가 바르지 않았다. 이는 어머니에게 쓴 편지였다.
이우근의 피맺힌 일기도 여기서 끝이 나고 말았다.
적힌 수첩이 검붉은 피로 얼룩이 진채 있었다.

6월 25일
아침에 비, 차차 개다.
새벽 38선에서는 공산당의 공격으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국군이 잘 싸우고 있다니 안심이다.
38선에서는 가끔 전투가 벌어 졌지만 이번에는 다른 것 같다.

6월 26일
월요일 날씨 맑다.
혜화동 입구에 학생들이 떼를 지어 수근거리고 있다.
어제 적기가 서울 상공에 나타나고 밤에는 등화관제로 암담했던얘기들을 주고 받는다.
수업도 없고 선생님들은 교무실에서 회의만 계속하고 있다.
전세가 심상치 않은가 보다 육군본부의 발표는 그렇지 않다.

6월 27일
화요일 흐리고 비가 오다.
국군은 서울을 사수한다고 안심하라는 가두 방송을 한다.
안심해도 될까? 공산군이 의정부를 지나 도봉산까지 내려 왔다고들 한다.
무서은 "탱크!"  "탱크"는 대포를 맞아도, 포탄을 맞아도 움찔할 뿐 이라고한다. 정말 무서운 모양이다. 덕만이가 두 동생을 데리고 나왔다.
우선 한강을 건너야 겠다는 막연한 생각에 한강까지 왔으나 한강교는이미 군부대의 경계를 받고 있어 건널 수가 없었다.

절망적인 우리는 한강 상류로 갔으나 배가 있을리 없고, 유유히 흐르는강물만이 있을 뿐이다.
한강이 바다처럼 광막해 보였다.
절망 앞에서 인간은 신으로 귀착한다.
신을 향한 기도 백발 노인을 만나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녔다.

6월 28일, 수요일
어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새벽 3시경 두 번 천지를 진동하는 폭발음을 들었다.
아침에 한강교가 폭파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일행(6명)은 다시 남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7월 2일, 일요일
복부에 총상을 입고 신음 중인 국군을 만났다.
도와 주려고 했으나 한사코 거절하면서 최후까지 적을 죽이겠다고적지를 향해 기어갔다.
참으로 장하고 장하다. 10분쯤 지났을까?
수류탄 폭발음을 들었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국군 상사의 모습이눈에 선하다.
아! 인간이 죽은 자리를 선택하는 건 정말 엄숙한 것이구나

7월 3일 월요일
안성을 거쳐 평택까지 왔다.
평택에서 김철규신부님을 만나 경향신문사 지프로 청주까지 왔다.
덕만이는 두 동생때문에 청주에 머무르고 나는 계속 김신부님과대구까지 왔다.

7월 20일 목요일 쾌청
대구에 나갔다가 학도병 모집 벽보를 보았다.
"가자! 김석원장군 휘하로!" 라는 구절이 나를 뜨겁게 했다.

7월 25일 화요일 쾌청
대한 학도 의용대가 있는 동아 빌딩 2층에 갔다.
학도병 지원서에 날인 했다.
벌써 많이들 모였다.
효신이 아버남께 인사를 하고 대구를 떠났다.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다.

7월 26일 수요일 쾌청
학도 의용대라는 완장과 태극 마크를 그린 흰띠를 받다.
바야흐로 나는 학생 아닌 병사가 된것이다.
병사는 전투를 통해서만 생명의 불꽃이 빛나리라

7월 27일 목요일 흐림
안동에 도착했다. 대포 소리를 듣고 기관총 소리도 들었다.
전선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새삼스런 긴장이 전신을 죄었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걱정된다.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참을 수가 없다.
왜 우리가 뿔뿔이 헤어져야 한단 말인가...생각할 수록 안타깝기만 하다.

8월 10일 목요일 쾌청
천신만고 끝에 포항에 도착했다.
교복은 누더기가 되고 신발은 신은 것인지...벗고 다니자니 체면이서기 때문에 그저 걸치고나 있다고 할까
총도 총이지만 우선 옷과 신발을 주었으면...
김용섭형(중대장님)에게 건의 했더니 사람은 빨가 벗고 태어났다고뜻있는 농담을 했다.
오랜만에 콩나물국을 먹었다.
팬티와 러닝을 빨아 입었다. 땟국물이  많이도 나왔다.
내복은 청결히 빨아 입었으니 이제 언제 죽더라도 수의는 마련된 셈이된다.
어릴적 생각이 났다. 발가벗고 미역 감고 모래 밭에서 뒹굴던 어린 시절...
아니다, 지금 어린 시절만 생각할 때가 아니지...
전선에 선 병사답지 않게 말이다.

아! 어머니!
나는 서울 쪽을 향해 두 번 절을 했다.
윤재정이 날 놀려댔다.
"뭣하고 있어? 이우근!"
나는 한마디 해 줬다.
"너는 모를 거야, 뜻이 있는 자의 행동은 뜻 있는자 만이 안다"
재정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제법 건방진 소리를 했지만 사실은 어머님과 아버님에게 포항안착을 알려드린 것 뿐이다.
나비가 춤을 추고 있다.
꽃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가라앉고 평화가 가슴에 자리 잡는다.
이렇게 평화스러운데 왜 전쟁이 터졌는가?
황기태는 애인 자랑을 하지만 나는 아끼는 소녀가 있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 눈매고운 소녀 생각이 난다.
언제나 잘 손질한 세일러복이 멋있었고, 고개를 숙이고 치켜뜨던그 눈매가 명멸하여 나를 사로 잡았다.
전쟁이 끝나고 학교에 돌아가면 그때 그 소녀에게 무용담을 말하리라
오후 3시, 포항여중 강당으로 옮겼다.
국민학교 교사 보다는 역시 여자 중학교 강당이 마음에 든다.

              1950, 8, 11 쾌청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 여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2명의 특공 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저의 고막을 찢어 놓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제 귓속은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차있습니다. 괴뢰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우기 같은 언어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님!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 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 앉을 것 같습니다.
학우들은 죽음을 기다리고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인민군은 지금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인민군 수는 너무나 많습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니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왜 수의 생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어머님!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저희들을 살려두고 물러갈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님! 저는 꼭 살아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문득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들이키고 싶습니다.

어머님!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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