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샘. 함민복
2022. 4. 20. 08:15ㆍ시와글
네 집에서 그 샘으로 가는 길은 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이면 물 길러 가는 인기척을 들을 수 있었지요. 서로 짠 일도 아닌데 새벽 제일 맑게 고인 물은 네 집이 돌아가며 길어 먹었지요. 순번이 된 집에서 물 길어 간 후에야 똬리 끈 입에 물고 삽짝 들어서시는 어머니나 물지게 진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있었지요. 집안에 일이 있으면 그 순번이 자연스럽게 양보되기도 했었구요. 넉넉하지 못한 물로 사람들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던 그 샘가 미나리꽝에서는 미나리가 푸르고 앙금내리는 감자는 잘도 썩어 구린내 훅 풍겼지요.
- 시집 《말랑말랑한 힘》(2005) 수록
'시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림자. 함민복 (0) | 2022.04.20 |
---|---|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0) | 2022.04.20 |
동창이 밝았느냐. 남구만 (0) | 2022.04.20 |
이니스프리의 호도. 예이츠 (0) | 2022.04.20 |
이니스프리의 호도 윌리엄 예이츠 (0) | 2022.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