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향수

2022. 6. 10. 08:04시와글

정지용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서리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ㅡ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ㅡ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섭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ㅡ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ㅡ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 도란거리는 곳,





ㅡ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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