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계절. 정호승

2025. 1. 3. 00:00시와글

나에게 첫눈이 내리는 것은
용서의 첫눈이 내리는 것이다
나에게 마른 잎새들이 제 몸을 떨어뜨리는 것은
겨울나무처럼 내 마음의 알몸을 다 드러내라는 것이다나는 오늘도 단 한사람도 용서하지 못하고
첫눈도 배고픈 겨울 거리에서
눈길에 남겨진 발자국에 고인 핏방울을 바라본다
붉은 핏방울 위로 흰 눈송이들이
어머니 손길처럼 내려앉아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다/나와 함께 떠돌던 신발들을 데리고
용서의 자세를 보여주며 늠름하게 서 있는
첫눈 내리는 나목의 거리를 정처 없이 걸어간다
배가 고프다
인사동에서 술과 밥을 사 먹어도 배가 고프다
산다는 것은 서로 용서한다는 것이다
용서의 실패 또한 사랑에 속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용서의 계절은 오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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