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1. 00:00ㆍ시와글
어려서 아버지께 편지를 자주 쓴 것
첫 줄을 쓰기 위해 별을 올려다본 것
슬픈 밤마다 별들과 가만히 눈을 맞춘 것
실패한 아버지를 찾아 떠도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혼자 조용히 운 것
수업 시간에 창밖을 자주 내다본 것
화폭에 칠한 색감에 몰입하는 시간이 좋았던 것
수시로 도서실로 달려가던 오후
'사랑이 무성한 수풀' 같은 소설 제목에 끌려
무성한이란 말과 수풀에 대해 수많은 상상을 한 것
나이 들어서 결국 숲속에서 살게 되었고
영혼을 편하게 하는 일이 숲의 일이라는 걸 알게 된 것
내 인생에서 잘한 일을 들라면
나는 이런 것들을 떠올린다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진 것
인내의 길이를 길게 늘여가는 게 시간이고
시간이야말로 은혜롭다는 것
시간이 사람을 깊게 한다는 말을 믿은 것
어머니에게 여린 마음의 씨앗을 물려받은 것
그 씨앗이 자라
제비꽃 애기똥풀 같은 꽃만 보아도 마음이 순해지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면 마음이 선해지던 것
스무살에 니체를 알게 된 것
반야심경을 꼼꼼히 읽은 것
좌절과 자학이 질펀하던 시절에
사르트르와 키르케고르를 만난 것
빈곤한 날들의 끝에 톨스토이를 좋아하게 된 것
변방에서 쑥부쟁이처럼 비천하게 살았지만
의롭게 살다 간 사람들의 인생을 흠모하게 된 것
시골 학교 선생으로 오래 일한 것
그것도 잘한 일의 목록에 들어가야 할 듯싶다
세상에는 문자를 만들어 나무껍질에 새겨
공유하기 시작한 이도 있고
범람하는 세상의 강을 다스리는 일에 생을 던진 이도 있고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려낸 이도 있고
증기의 압력으로 동력을 얻어 새 시대를 연 이도 있으나
나는 세상을 바꾸는 어마어마한 일을 하거나
역사의 물줄기를 튼 사람들 근처에도 못 간다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게 더 많고
세상에는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많다는 걸 안다
내 안에는 빛보다 그늘이 많지만
그늘도 사랑하고 햇빛도 사랑한다
햇빛에 반짝이는 부분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그늘진 곳이 나를 겸손한 자리에 머물게 한다
내 인생이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 하는지
아직도 다 알지 못하지만
여기까지 함께 와준
고마운 내 인생을 향해 편지 한장 쓰는 밤
별을 올려다보는 밤이 깊다
- 도종환,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창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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