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의 잠. 정호승

2022. 6. 24. 08:44시와글

누구나 잃어버린 시계 하나쯤 지니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 잃어버린 시계를 우연히 다시 찾아
잠든 시계의 잠을 깨울까봐 조용히 밤의 TV를 끈 적이 있을 것이다
시계의 잠속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보고
그 눈물 속에 당신의 고단한 잠을 적셔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동안 나의 시계는 눈 덮인 지구 끝 먼 산맥에서부터 걸어왔다
폭설이 내린 보리밭 길과
외등이 깨어진 어두운 골목을 끝없이 지나
술 취한 시인이 방뇨를 하던 인사동 골목길을 사랑하고 돌아왔다

오늘 내 시계의 잠 속에는
아파트 현관 복도에 툭 떨어지는 조간신문 소리가 침묵처럼 들린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너의 폭탄테러에 죽었다가 살아났다
서울역 지하도에서 플라스틱 물병을 베고 잠든
노숙자의 잠도 다시 죽었다가 살아나고

내 시계의 잠 속에는 오늘
폭설이 내리는 불국사 새벽종 소리가 들린다
포탈라 궁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 젊은 라마승의 선혈 소리가 들린다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위를
부지런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젊은 애인들이 보인다
스스로 빛나는 눈부신 아침햇살처럼
내 가슴을 다정히 쓰다듬어주는 실패의 손길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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