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정호승

2024. 7. 22. 00:00시와글



아파트 경비원 혼자 라면을 끓인다
한 평 남짓한 좁은 경비실에 앉아
입을 벌리고 졸다가 일어나
끓인 라면을 혼자 먹는다
한낮에 맑게 울던 매미는 울지 않고
오늘따라 별들도 보이지 않고
밤늦게 주차하는 자동차의 찬란한 불빛을 뚫고
키 작은 소녀
김치 한 사발을 들고 온다
인간에게는 왜 도둑이 있는지
인간이 왜 아파트를 지켜야 하는지
인생을 지키기도 힘든 여름밤
거미줄이 내 얼굴에 걸려 무너진다
나는 아직 거미의 먹이가 되지 못하고
거미의 일생만 뒤흔들어놓는다

- 정호승 시집

<포옹>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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